2013년 4월 19일 금요일

필리핀 보라카이. 세계 3대 해변에 서서 세계 3대 석양을 바라보다.

필리핀 보라카이. 세계 3대 해변에 서서 세계 3대 석양을 바라보다.

보라카이(Boracay).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어감이다. 70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 중남부 내해에 위치한 이곳은 세계 어떤 미디어가 꼽더라도 '세계 3대 해변'에 늘 이름을 올리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3대 석양'이 비추는 곳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1,2대가 어느 곳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그곳이 몰디브였건 칸쿤이었건 간에). 다만 휴가 문화의 최고 선진지역인 유럽인들이 늘 궁금해 하고 동경하는 곳이 바로 '보라카이'라기에, 우린 마침 필리핀과 가까운 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연인들에게도 좋지만 가족 휴가지로도 안성맞춤이다. 보라카이에는 하루에 '3막4장'의 멋진 무대가 펼쳐지니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즐기며 쉬면 된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버티고 선 아래 밀키블루의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노을이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에는 해변을 거닐면 된다.

명동만큼이나 수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해변 클럽과 바를 순회하는 뜨거운 밤은 보라카이에서의 하루일과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최근 다녀온 보라카이지만, 앞으로 다시 휴가를 떠나기에 우선 고려해야 할 버킷리스트에 다시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이름을 올렸다.

◇그림 속에서 먹고 쉬고 마시고

주로 '핫'한 나이트클럽이나 라운지 바의 이름에 쓰여온 탓인지 보라카이는 국내에서 무척 익숙한 지명이다. 참고로 나이트 클럽 등 유흥업소들은 손님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줘야 하는 까닭에 코파카바나(브라질)와 산토리니(그리스) 등 항상 누구나 인정하는 '이상향'의 이름을 차용하게 마련이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를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나기처럼 작열하는 태평양의 햇빛, 길고 넓은 하얀 모래밭. 그리고 새파란 하늘과 바다 정도는 사실 북위 30도에서 남위 30도 사이 바닷가에 널렸다. 그것만 가지고서 열광할 일은 아니다. 보라카이가 멋진 것은 인간이 누리기에 과분한, 최대의 자유로움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평소 태국 카오산 로드의 자유로움과 멕시코 칸쿤의 아름다운 해변, 하와이 와이키키의 화려함까지 함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곳이 바로 보라카이와 매우 닮았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아령처럼 생긴 보라카이의 해변은 내려서 보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가장 유명한 화이트샌드 비치(다소 직관적이긴 하지만 이보다 멋진 이름이 있을까!)는 약 4㎞로 그야말로 명사십리다. 모두 합하면 약 7㎞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모래밭이 넓기도 해서 호텔들이 거의 해변 위에 지어진 셈이다. 그래서 문을 나서면 다시 모래길을 건너야 물가에 닿을 정도다. 산호가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는 너무도 보슬보슬 고와 발톱 사이로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간질간질한 느낌도 좋다.

낮에는 이 길고 넓은 해변에서 그저 누워있거나 때론 수영을 즐긴다. 꽤 멀리까지 나가도 물이 허리춤 밖에 오지 않아 수영이라기 보다는 그저 더위를 식히거나 소변이 급할 때 이용하기에 딱이다. 어린이를 둔 가족에게도 좋다.

선베드에 누워서 매혹적인 물빛을 감상하자면 굉장한 부자라도 된 기분이다. 눈앞에는 정말 누가 일부러 그려넣은 듯한 세일링 요트들이 돌아다니고 수평선 멀리에선 공수부대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듯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이 모든 게 보라카이의 기나긴 해변을 심심하지 않도록 만드는 데코레이션이며 결국엔 모두 나를 위한 것이다.

더욱 근사한 일은 밤이 되면 이 해변에 멋진 비치 바와 클럽, 레스토랑이 펼쳐진다는 사실. 야자수에 천막을 묶어 천장을 가린 해변 바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산미구엘 맥주를 마시고 있노라면(바로 땀으로 변해서 배출될테지만 '라이트(San Miguel Lite)'가 맛있다) 자신이 정말 영화에서와 같은 휴가를 즐기고 있음을 느낀다.

◇밤이 더욱 아름다운 해변

보라카이는 끈풀린 강아지처럼 돌아다니기에 딱 좋은 곳이다. 도착한 첫날 밤부터 해변으로 나섰다. 우선 '오전 8시의 신도림역'을 방불케하는 인파에 깜짝 놀랐다.

모래를 밟으며 식사할 곳을 찾는 이들이 양방향으로 지나는 행렬이 끝도 없다.

길가에는 종업원들이 늘어서서 근사한 요리를 그려넣은 메뉴판(모두 가격만 볼테지만)을 저마다 들이민다. 레스토랑과 기념품숍, 바와 클럽, 마사지숍 등 각양각색의 업소들이 양쪽(바닷가 쪽은 업소의 야외 테이블)으로 길게 늘어서 있어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해변의 가게라 해서 한국의 대천 해수욕장 포장마차를 떠올리면 큰 오산이다. 비싼 크레파스 세트를 연상케하는 각색 술병을 주욱 세워놓은 칵테일 바에는 바텐더가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만들고 있고, 고급스럽고 모던한 천막을 친 클럽에선 최신 하우스 뮤직이 흘러나온다. 웃통을 벗어제낀 남자 둘이 가엾게도 길가의 비키니 차림 여성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바도 있다.

스테이션 2(보라카이의 리조트 지역은 발라바그 비치의 스테이션 1~3을 중심으로 불라보그,푸카쉘(Puka shell) 비치 등이 있다)를 중심으로 한 이 번화한 길은 해변의 길이만큼이나 긴 까닭에 며칠을 똑같이 지나다녀도 질리지는 않는 대신 사흘 정도 지내다보면 서로 얼굴을 익힐 것만 같았다. 모래밭 길에 유모차를 몰고 다니자니 힘이 든다. 불도저처럼 해변에 길을 내며 다니게 된다.

너무도 더워 근처에 있는 '아일랜드 엑조틱 바'란 이상한 이름의 바를 찾았다. 그나마 호텔과 가깝고 한적해 보였다. 별이 총총 박힌 하늘 아래 파도 소리가 재잘대는 해변에 젖은 소파를 내놓고 칵테일과 맥주를 파는 곳이다. 맥주병을 놓고 앉았자니 습하지만 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서울의 폭염 소식에 괜히 못된 자부심까지 생겨난다. 도심의 비실비실한 에어컨은 아예 생각나지도 않는다. 이렇게 밤은 깊어가고, 몇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태양이 다시 강력한 햇살을 하늘에 조사하며 떠올라 해변을 비춘다.

비행기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는 새로운 휴가객들을 매일 쏟아내고, 휴가가 거의 끝나 우울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싣고 떠난다. 불행하게도 난 도착한 지 사흘만에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 틈에 섞여 보라카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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